2019.2

광화문 사냥꾼과 고기 미학

 

글: 석혜원(독립큐레이터)

 

하나같이 비슷한 양복차림의 수많은 직장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출근길의 광화문의 일상적인 풍경을 보며 허보리작가는 가족 부양을 위해 사슴사냥을 나가던 원시부족사회의 ‘사냥꾼’을 떠올린다. 아이를 안고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할 때엔 본인의 모습이 사냥을 떠나는 남편을 배웅하는 간난아이에게 젖을 주는 과거 움집의 여인과 다르지 않다 느끼고, 식구(食口)들을 위해 부위별로 포장된 붉은 살코기들을 고르며 사냥꾼이 획득한 전리품을 상상한다.

이렇게 허보리작가의 작업은 유독 주변에 대한 관찰과 삶을 향한 따뜻한 시선에서 출발한다.

 

과거 무장가장시리즈에서 작가는 승자독식, 피라미드 구조의 사회 속에서 가족 부양을 위해 일하는 가장들의 모습을 힘없는 무기로 표현한바 있다. 이전 작업들이 ‘무장가장-사냥꾼‘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전시는 사냥꾼이 획득한 ’전리품‘에 주목한다.

이 시대의 가장들은 진짜 피를 흘리지는 않지만 매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전쟁터에서보다 더 치열하게 싸워 전리품인 ‘월급’을 얻는다. 작가는 현대사회의 전리품을 기념비로 만들어 사냥꾼들의 노고에 찬사를 보내며 경의를 표한다.

 

이번 전시 <광화문 사냥꾼>에서 선보이는 10점의 작품은 고기의 부위별 마블링을 수놓은 위풍당당한 고기추상이다. 언젠가는 굉장히 훌륭했던 무기였던 광화문 사냥꾼들의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뜯고 자르고 이어붙인 바탕 위에 반복적인 바느질이란 노동집약적 행위를 통해 전리품을 기념비로 만들었다. 면사 여섯가닥이 꼬여있는 자수실을 한가닥씩 뽑아 마치 소묘를 하듯 수놓은 채끝살, 살치살, 등심, 안심, 양지머리의 각기 다른 마블링은 와이셔츠와 넥타이 위의 추상화가 된다.

 

허보리작가는 가장 아름다운 패턴을 찾기 위해 그녀의 심미안으로 참 많은 고기들을 수 없이 들여다보고 가장 예쁜 마블링을 가진 고기를 발견한다. 넥타이와 셔츠를 고르고 해체하고 꿰매는 행위, 전리품의 아름다운 패턴을 수실로 한땀한땀 수놓는 수없이 반복적인 행위와 시간이 모여 화려한 작품이 완성된다.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은 옷을 해입고 이불을 꿰매던 과거의 여성들의 손바느질과 오롯이 닮아있다.

 

그녀는 바느질과 전통 자수를 작업의 방식으로 택함으로써 매일의 반복적 노동을 적층시킨다. 얇은 수실이 반복적으로 수놓아져 만들어지는 고기의 마블링은 현대인들의 매일의 노동이자 수고로운 시간의 기록인 것만 같다. 입체적이면서도 다분히 회화적인 허보리의 고기추상은 발탁 받은 임금노동자-광화문 사냥꾼들의 수고에 찬사를 보내는 동시에 남녀 간의 전통적 역할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현대사회에서조차 여전히 전통적인 여성성을 강요받는 여성들의 그림자 노동을 동시에 조명한다.

@스페이스몸 거울아 거울아 

2016. 9

허보리의 ‘풍자-거울’

류병학 미술평론가

“매일아침 생계를 위해 일을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원시시대에 인간이 죽지 않고 살아 남기위해 도구를 들고 고기를 사냥하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사회에서의 통용되는 돈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사냥감이나 다름없는 것은 아닐까. 또한 고기를 먹을 때의 인간의 탐욕스러운 인상 혹은 더 나아가 육식동물이 가지는 어떤 잔인함과 게걸스러움 같은 것들이 이 사회 안에서 보이는 크고 작은 비인격적인 행태와 감정들. 배신, 살인, 증오와 같은 모습으로 연상되었다. 육식 동물 같은 포악함은 숨긴 채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정숙한 정장을 입고 거짓 웃음으로 한 번 더 포장하여 어떤 다른 형태의 수렵과 사냥의 행동들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 허보리의 작업노트 중에서

허보리는 스페이스몸미술관 3전시장에 3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클래식 수류탄>과 <채끝살 니들 드로잉> 그리고 <4인 삽탁>이 그것이다. <클래식 수류탄>은 천으로 제작한 ‘부드러운 수류탄’ 작품이고, <채끝살 니들 드로잉>은 마치 종이에 드로잉 하듯이 천에 수를 놓은 작품이고, <4인 삽탁>은 나무판과 4개의 삽들로 제작된 ‘식탁’이다. 우선 스페이스몸미술관 1전시장에서 보았던 허보리의 <부드러운 M4>처럼 천으로 제작된 일명 ‘부드러운 수류탄’을 보자.

허보리의 <클래식 수류탄>은 백색의 좌대 위에 천으로 만든 수류탄을 설치해 놓은 작품이다. 일단 백색의 좌대부터 보자. 그것은 마치 위대한 영웅들을 조각한 기념비상을 우러러보도록 만들었던 좌대처럼 보인다. 물론 작가는 장인의 손을 빌려 그 백색의 좌대를 제작했다. 그리고 그 좌대 위에 진열된 수류탄을 마치 고귀한 유물을 진열해 놓는 것처럼 투명한 유리 케이스로 보호해 놓았다. 따라서 누군가 ‘부드러운 수류탄’을 훔치기 위해 유리 케이스를 만지면 곧 경보음이 울릴 것처럼 느껴진다.

황금액자에 끼워진 <부드러운 정물>과 백색의 받침대 위에 진열된 <클래식 수류탄>은 어느 순간 사라진 현실세계와 가상(회화)세계 사이의 경계인 회화의 ‘액자(Frame)’와 전통적 조각의 지지체인 '받침대(pedestal)'를 다시 재고하게 한다.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칸트(Immanuel Kant)의 ‘자기비판’ 논리를 회화에 적용하여 ‘회화의 자율성’을 주장했다. 그의 ‘모더니스트 회화(Modernist painting)’는 ‘회화의 평면성(flatness of painting)’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그린버그가 규정하는 모더니즘 회화의 평면성은 앙드레(Carl Andre)가 ‘회화의 길’이라고 말한 스텔라(Frank Stella)의 일명 ‘띠 그림(Stripe Painting)’에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다. 회회를 회화로 가능하게 했던 ‘틀’인 액자는 사라지고 결국 회화는 벽면에서 돌출하여 저드(Donald Judd)의 ‘특별한 오브제(specific object)’로 전환되었다.

부엌용 의자 위에 자전거 바퀴를 접목시킨 뒤샹(Marcel Duchamp)의 <자전거 바퀴(Roue de bicyclette)>는 전통적인 조각에서 볼 수 있는 이원구조, 즉 조각(작품)/받침대라는 이분법을 해체했다. 뒤샹의 레디-메이드(ready-made) 이후 전통적인 조각은 가상세계의 받침대로부터 해방되어 현실세계의 ‘땅’을 지지대로 삼게 되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조각으로, 앙드레의 일명 ‘철판 조각’처럼 관객이 발로 밟을 수 있는 조각으로, 급기야는 관객을 조각 안으로 끌어 들이는 조각으로 변화되었다.

데리다(Jacques Derrida)는 <파르에르곤(Parergon)>이라는 텍스트에서 칸트의 <판단력 비판(Critique of Judgement)>에서 회화의 액자와 조각의 받침대를 뜻하는 ‘파르에르가(Parerga)’에 주목한다. 그는 예술에 관한 철학적 담론들이 회화의 액자나 조각의 받침대를 작품(Ergon)에 기생하는 ‘부차적인 것(parergon)’으로 간주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는 그 부차적인 것이 작품을 보호하기 위한 작품에 유용한 것이면서 동시에 작품에 위협을 가하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회화의 ‘액자’나 조각의 ‘받침대’는 작품의 밖(hors d'oeuvre)에 있으면서 동시에 작품에 귀속되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회화의 진리(La v rit en peinture)>에서 플라톤(Platon)으로부터 칸트,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 훗설(Edmund Husserl) 그리고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로 이어지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예술의 철학적 언술이 예술작품의 안과 밖 사이의 경계에 관한 하나의 담론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예술에 관한 위대한 철학적 담론은 안/밖을 대립시켜 밖을 배제한 안의 규정으로 규결되었다고 데리다는 지적한다. 때문에 그러한 철학적 담론은 항상 파르에르곤에 반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파르에르곤을 통해 에르곤 중심의 예술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해체시킨다.

허보리는 어느 순간 사라진 회화의 ‘액자’와 조각의 ‘받침대’를 부활시킨다. 그런데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액자와 받침대는 허보리의 작품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작품의 요소로 출현한다는 점이다. 만약 <부드러운 정물>에서 ‘황금액자’가 부재한다면 지나가면서 중얼거렸듯이 ‘앙꼬 없는 찐빵’이 될 것이고, 마찬가지로 <클래식 수류탄>에서 백색의 좌대를 없앤다면 ‘사랑 없는 동거’가 될 것이다. 따라서 그녀에게 액자나 받침대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작품에서 액자나 받침대는 ‘정물화’나 ‘부드러운 수류탄’처럼 작품을 구성하는 ‘약방의 감초’ 같은 요소이다.

자, 이번에는 백색의 진열장 안에 보관해 놓은 천으로 만든 ‘부드러운 수류탄’을 보자. 당신이 그 ‘부드러운 수류탄’으로 한 발짝 다가가서 본다면, 그것이 졸라 비싼 실크 넥타이를 해체시켜 바느질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볼 수 있다. 그렇다! 허보리의 <부드러운 M4>가 그녀의 남편이 착용했던 정장 한 벌을 통째로 사용하여 ‘부드러운 소총’으로 변형시킨 것처럼, <클래식 수류탄>은 그녀의 남편이 사용하던 실크 넥타이를 사용하여 ‘부드러운 수류탄’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와이? 왜 그녀는 남편의 정장과 넥타이까지 ‘무기’들로 변형시킨 것일까? 남편의 의상과 무기 사이에 어떤 문맥이라도 있단 말인가? 허보리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살상을 하는 무기의 모양으로 돈을 벌기위해 필요한 전투정신을 말하되. 어떠한 상처도 줄 수 없는 무기력한 무기들의 질감으로 그 아이러니함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연민하고 위로하는 마음으로. 혹은 '우리 이제는 좀 다를 수 없을까' 라는 애통한 마음을 섞어서 많이 부드럽고 폭신하고 뚱뚱하게 만든다. 바지의 칼주름은 곡선을 그리며 늘어진 대포로, 정갈한 실크넥타이는 껴안기 좋은 크기의 보드라운 권총으로. 칼은 완전히 방전되어 축 쳐진 퇴근길의 직장인처럼 온전히 서있지도 못하게 그렇게. 더 격렬하게 쓸모가 없는 무기들이다.”

허보리는 아침마다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직장으로 나서는 남편을 보고 마치 전쟁터로 나서는 것 같다고 한다. 따라서 그녀에게 양복과 넥타이는 옛 군사들이 싸움터에 나설 때 입는 ‘갑옷’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의 양복과 넥타이로 ‘부드러운 무기’들을 만든다. 물론 그녀는 무기들을 제작하기 위해 용산 전쟁기념관을 드나들고, 인터넷에 나오는 무기 사이트와 전문 블로그, 밀리터리 매니아들의 쇼핑 사이트도 서핑하고, 실물 사이즈 무기 프라모델들을 구입하여 조립하면서 무기의 구조를 연구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허보리의 ‘무장가장(武裝家長)’이다.

스페이스몸미술관 3전시장에는 방이 하나 있다. 그 방 안에는 네 개의 다리들을 삽들로 제작한 탁자와 벽면에 마치 ‘가훈(家訓)’처럼 보이는 그림이 설치되어 있다. 신작 <채끝살 니들 드로잉>과 <4인 삽탁>이 그것이다. 우선 <채끝살 니들 드로잉>을 보도록 하겠다. 그것은 마치 ‘붉은 단색화’처럼 보인다. 그런데 필자가 그 ‘붉은 단색화’로 한 걸음 다가가니 그것은 고기 덩어리 하나가 유리 액자 안에 넣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허보리의 <채끝살 바느질 드로잉>은 최근 국내 미술시장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단색화’에 대한 조롱, 즉 ‘한물간’ 단색화에 대한 일종의 ‘똥침’이란 말인가?

필자의 키보다 높은 곳에 설치된 고기 덩어리가 들어있는 액자는 다행이도 보기 편하도록 필자의 시선으로 기울어져 있다. 붉은 그 고기 덩어리는 언 듯 보기에 먹음직스런 등심으로 보인다. 그런데 유리 액자에 넣어진 그 등심은 하나도 변색되지 않고 싱싱해 보인다. 당 필자, 궁금한 나머지 그 고기 덩어리로 한 걸음 더 다가가 본다. 오잉? 붉은 고기 부위는 붉은색 실크 넥타이들로 바느질한 것이고, 대리석 무늬의 지방들은 와이셔츠로 수를 놓은 것이 아닌가. 그 가짜 등심을 허보리는 <채끝살 바느질 드로잉>으로 명명했다.

채끝살은 등심에서 이어지는 허리 부분의 고기로 안심 위의 부분을 뜻한다. 채끝살은 육질이 연하고 향기가 좋고, 특히 풍미가 좋아 스테이크나 생고기 구이, 샤브샤브 등에 이용된다. 두말할 것도 없이 맛도 좋다. 그러나 허보리가 붉은색 실크 넥타이들을 해체시켜 바느질한 ‘채끝살’은 일종의 ‘그림의 떡’이다. 그런데 허보리의 ‘부드러운 무기’와 ‘부드러운 고기’ 사이에는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허보리의 진술을 들어보자.

“흘러가는 삶속에서 나와 내 주변인물들이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는 것을 본다. 그가 처한 상황이나 감정에 따라서 인간은 은유적으로 다른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음식이나 일상적인 사물들이 갖고 있는 조형적인 특징과 기능에 사람의 감정을 빗대어 그 사람을 대신하는 상태로 만든다.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장면, 그러나 감정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오히려 사진이나 극사실의 회화보다 더 구체화된 상황을 연출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허보리의 거울에 비친 붉은 고기 덩어리가 인간의 본래 모습이란 말인가? 문득 ‘고기’를 사냥하던 원시인이 떠오른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 역시 ‘고기’를 얻기 위해 일터로 나간다는 점에서 원시인의 사냥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그녀는 ‘지금 이 사회에서의 통용되는 돈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사냥감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덧붙여 그녀는 ‘고기를 먹을 때의 인간의 탐욕스러운 인상’에서 ‘육식동물이 가지는 어떤 잔인함과 게걸스러움 같은 것들’을 떠올리면서 그것이 ‘이 사회 안에서 보이는 크고 작은 비인격적인 행태와 감정들’, 즉 ‘배신, 살인, 증오와 같은 모습으로 연상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허보리에게 더 가증스럽게 보인 것은, 우리가 ‘육식 동물 같은 포악함은 숨긴 채’ 우리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정숙한 정장을 입고 거짓 웃음으로 한 번 더 포장하여 어떤 다른 형태의 수렵과 사냥의 행동들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허보리는 붉은 실크 넥타이들을 해체시켜 바느질하여 제작한 붉은 고기 덩어리를 넣은 액자를 방의 벽면에 마치 가훈처럼 걸어놓았다. 머시라? 전쟁(직장)에서 얻은 ‘전리품(戰利品)’이 조상 대대로 그 집안의 자손들에게 도덕적인 실천 기준으로 가르치는 교훈이라고...요?

자, 마지막으로 허보리의 <4인 삽탁>을 보자. 그것은 일반 가정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4인 가족이 사용하는 4인 식탁과 닮았다. 물론 식탁의 크기나 높이 등을 본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 식탁의 다리들은 모두 삽으로 교체되어 있다. 더욱이 그 ‘삽탁’은 삽의 뾰족한 부분이 바닥에 맞닿아 있어 아슬아슬해 보인다. 만약 누군가 그 ‘삽탁’을 살짝 만지기라도 한다면 곧 무너질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그 삽탁을 방 한복판에 아무런 경고판도 없이 버젓이 설치해 놓았다.

당 필자, 안전이 걱정되어 몸을 숙여 삽탁의 밑 부분을 살펴보았다. 오잉? 삽이 탁자의 나무판 안에 끼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허보리는 장인 목수의 도움을 받아 식탁의 높이만큼 삽의 손잡이 부분을 잘라내고, 두께가 있는 나무판에 삽의 손잡이 부분을 끼울 수 있도록 파내었다고 한다. 그리고 손잡이 부분을 잘라낸 삽을 나무판의 홈에 끼워 완성시킨 것이다. 그런데 허보리의 <4인 삽탁>은 <채끝살 바느질 드로잉>과 어떤 관계가 있는/없는 것일까? 그 점에 관해 허보리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이 사회의 최소단위인 가정이 굴러가기 위해 부지런히 돈을 버는 가장(家長)들이 있다. 그것이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그들은 이 사회와 문화가 그들에게 떠맡긴 알 수 없는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기계적인 출근을 하고 그 안에서 상대방을 밟고 올라가야만 살아남는 잔인한 구조에 떨어지게 된다. 그것이 정말 내가 원했던, 혹은 나를 위한 싸움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채 너덜너덜 투쟁을 하고 지친 몸을 끌고 돌아온다. 집에서 먹이를 기다리는 ‘먹는 입(食口)’들이 노동의 대가인 돈으로 음식을 먹고 배불러 지지배배 댈 때 비로소 야릇한 성취감과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 허보리와 남편이 삽질해서 얻은 ‘전리품’으로 4인 가족이 먹고 산다. 그런데 열심히 삽질하여 얻어진 ‘붉은 고기 덩어리’는 ‘그림의 떡’이다. 그리고 ‘붉은 고기 덩어리’가 올려질 식탁은 ‘삽탁’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한 삽질은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고 행하는 ‘헛 삽질’이었단 말인가? 와이? 왜 허보리는 식구를 위해 열심히 행한 삽질을 ‘헛 삽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 점에 대해서는 필자가 앞에서 인용한 <부드러운 M4>에 관한 허보리의 진술에서 암묵적이나마 알려줄 것 같아 재인용해 놓는다.

“나는 인간의 삶 속에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어디든 존재하는 승리의 구조를 그저 상대를 죽이고 말아야 끝나는 ‘전쟁’의 모습으로 설정을 하고 작업을 하였다. 직장에서의 상징적인 의상인 정장, 양복으로 실제 사용되고 있는 무기들을 만들었다. 검은색 정장 바지 한 벌은 개인화 무기인 M4소총으로 만들었고 그 안을 물렁한 솜으로 채워 연약한 질감으로 쓸모없어지게 함으로써, 이 모든 애타는 승리를 향한 노력들이 부서진 파도 같은 허무함으로 보이게 하고 싶었다.”

필자는 지나가면서 허보리의 <부드러운 정물>을 언급하면서, 허보리가 ‘바니타스 정물’에 화려한 황금액자를 끼운 것을 힘들고 고된 나날을 보내는 관객에게 ‘희망의 총’을 쏘는 것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허보리의 <부드러운 N4>나 <클래식 수류탄> 그리고 <채끝살 니들 드로잉>은 관객에게 ‘헛 삽질’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허무적인 작품은 우리들이 매일 반복해서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는 ‘헛 삽질’만 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좌절할 수 없다. 우리는 다시 일어선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삶에 대한 긍정’ 때문이다. 그렇다면 허보리의 작품은 우리 삶에 대한 ‘풍자-거울’이 아닌가?

 

 

 

 

허보리의 ‘바니타스_미러(Vanitas_Mirror)’

 

 

류병학 미술평론가

허보리는 스페이스몸미술관 1전시장에 두 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부드러운 M4>와 <부드러운 정물>이 그것이다. <부드러운 M4>가 오브제 작품이라면, <부드러운 정물>은 회화다. 우선 허보리의 <부드러운 M4>를 보도록 하자. 그것은 백색 벽면에 설치한 백색 선반 위에 M4 카빈(Carbine)을 비치한 작품이다. 인터넷에서는 M4 카빈을 22구경이라 반동이 적고 탄도 특성도 좋고 탄값도 저렴해 남녀노소 부담 없이 갖고 놀기에 좋은 소총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M4 카빈이 미국에서 종종 벌어지는 총기난사 사건에 등장하는 미국 자동소총의 대명사라는 점에서 ‘놀기’에 좋은 소총이란 말을 무색하게 한다.

그런데 허보리는 ‘검은 악의 축’으로 불리는 M4 카빈을 갖고 ‘놀기’에 좋은 ‘부드러운’ 작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를테면 그 ‘부드러운’ 소총은 블랙 슈트 한 벌을 가지고 M4 카빈 소총을 모델로 제작한 작품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허보리의 ‘M4’는 일명 ‘그림의 떡’, 즉 살상의 기능을 박탈한 ‘부드러운’ 작품인 셈이다. 그녀의 ‘부드러운’ M4 소총은 무엇보다 방아쇠를 당긴다 하더라도 총알이 날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탄창을 갈아 끼울 수 없으며, 목표물을 조준할 때 꼭 필요한 가늠자와 가늠쇠가 ‘무늬’만 가늠자와 가늠쇠일 뿐이고, 총열마저 ‘거세’된 듯 밑으로 쳐져있다. 그렇다면 허보리의 <부드러운 M4>는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부드러운 M4>에 관해 허보리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나는 인간의 삶 속에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어디든 존재하는 승리의 구조를 그저 상대를 죽이고 말아야 끝나는 ‘전쟁’의 모습으로 설정을 하고 작업을 하였다. 직장에서의 상징적인 의상인 정장, 양복으로 실제 사용되고 있는 무기들을 만들었다. 검은색 정장 바지 한 벌은 개인화 무기인 M4소총으로 만들었고 그 안을 물렁한 솜으로 채워 연약한 질감으로 쓸모없어지게 함으로써, 이 모든 애타는 승리를 향한 노력들이 부서진 파도 같은 허무함으로 보이게 하고 싶었다.”

자, 이번에는 허보리의 <부드러운 정물>을 보도록 하자. 그것은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그린 일종의 ‘정물화’이다. 그런데 그 정물화에 그려진 사물들이 한결같이 군인이 사용하는 철모에서부터 수류탄 그리고 탄피들과 탄약통 또한 칼과 물통에 이르는 군용품들이 아닌가. 그런데 당신이 그 사물들을 다시 한 번 본다면, 그 이미지들이 실재 군용품들을 모델로 삼아 그린 것이 아니라 각종 천으로 제작된 오브제를 모델로 삼은 것임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허보리의 <부드러운 정물>은 ‘부드러운 무기들’을 재구성한 정물화라고 말이다.

흥미롭게도 허보리는 ‘무기’들과 이질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화려한 황금액자에 ‘정물화’를 끼워 넣었다. 와이? 왜 허보리는 ‘부드러운 무기’들을 그린 그림에 화려한 황금액자를 끼운 것일까? ‘정물화’는 움직이지 않는 정지한 사물을 그린 그림(靜物畵)을 뜻한다. 정물화는 영어로 ‘스틸 라이프(still-life)’로 표기되는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 ‘정지된 삶’을 뜻한다. 그리고 정물화는 프랑스어로 ‘죽은 자연’이라는 뜻을 지닌 ‘나튀르 모르트(nature morte)’로 표기한다. 정지된 삶? 죽은 자연? 허보리의 진술을 직접 들어보자.

“인간의 삶 속에 어디든 존재하는 승리의 구조는 ‘전쟁’의 연속으로 보였다. 현대인의 일터에서 상징적인 의상인 양복으로 실제 사용되고 있는 무기들을 부드러운 질감으로 만들었다.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 화풍 중 하나인 바니타스의 양식과 그 화풍의 일관된 주제였던 ‘인생의 허무함‘을 빌어 패러디한 작업이 <부드러운 정물>이다. 그동안 만든 여러 무기들로 피테르 클라스Pieter Claesz(1598 -1660)의 작품<Vanitas' Still life>의 구도와 빛의 느낌을 그대로 연출해본 작업으로 그 당시 화풍의 일관된 주제였던 ‘인생의 허무함(Vanitas)‘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허보리의 <부드러운 정물>은 피테르 클라스(Pieter Claesz)의 <바니타스 정물(Vanitas' still life)>(1630)을 패러디한 정물화라고 한다. ‘바니타스(Vanitas)’는 라틴어로 ‘헛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서구에서 정물화는 흔히 ‘허무한 삶’이나 ‘인생무상’을 뜻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티벳은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윤회의 과정으로 본다. 이를테면 죽음은 다시 태어나기 전에 거치는 한 과정이라고 말이다. 티벳처럼 죽음을 두려운 것이 아닌 다른 시선(?)으로 보는 것을 일컫는 말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가 있다.

라틴어 메멘토(memento)는 ‘기억’ ‘경고’ 등을 뜻하고, 모리(mori)는 ‘죽음’을 뜻한다. 따라서 메멘토 모리는 ‘죽음의 경고’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을 뜻한다. 결국 ‘죽음을 기억하라’는 격언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성찰, 즉 삶의 성찰을 뜻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허보리의 <부드러운 정물>은 우리에게 ‘죽음을 기억하라’, 즉 ‘인생무상’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와이? 왜 그녀는 삶을 허무한 것으로 보는 것일까? 왜 그녀는 허무한 삶을 무기에 비유한 것일까? 혹 그녀는 매일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을 마치 끔찍한 ‘전쟁터’ 같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허보리는 왜 ‘허무한 삶’에 화려한 황금액자를 끼운 것일까? 언 듯 보기에 ‘황금액자’와 ‘바니타스 정물’은 서로 이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허무한 삶’은 ‘화려한 삶’을 전제한다. 이를테면 회화에 액자가 없다면 ‘앙꼬 없는 찐빵’이듯이 허무한 삶에 화려한 삶이 없다면 ‘희망 없는 삶’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희망을 꿈꿀 자격이 있다. 그렇다면 허보리가 ‘바니타스 정물’에 화려한 황금액자를 끼운 것이 다름 아닌 힘들고 고된 나날을 보내는 관객에게 ‘희망의 총’을 쏘는 것이란 말인가?

2015.9

허보리

무장가장(武裝家長)

 서준호

 

여자가 남장을 하는 데 필수적인 요건이 넥타이를 매는 것이다.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는 것 자체가 남성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며 수많은 남성 가장들이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아침마다 직장으로 나선다. 허보리 작가는 그런 남성 가장들이 마치 전투를 하러 집을 나서는 것 같다고 한다. 삶이 치열한 전쟁 같은 점은 남성이나 여성이나, 양복을 입든 안 입든 마찬가지지만 작가는 남성의 아이콘인 넥타이와 양복을 소재로 만든 무기를 통해 삶의 치열함을 드러낸다.

삶의 고달픔, 치열함에 대한 고민은 애초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에나 등장할 법한 중세 방패와 칼을 입지 않는 양복과 넥타이 제작으로 드러났다. 어린 남자아이들이 어느 나이가 되면 좋아하게(환장하게) 되는 칼과 같은 중세 판타지물의 전투 아이템을 통해 경쟁으로 점철되는 현대인들의 상황을 드러내는 작업에 이어 작가는 판타지적인 면을 제거하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실제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실제 사이즈의 반으로 축소한 탱크와 실제 사이즈인 M4와 M2 자동소총 그리고 M2에 쓰이는 탄과 탄통, 여러 가지 고폭탄과 수류탄을 넥타이와 양복천으로 정교하게 제작해 누구든 작품을 들고 군인 흉내를 내고 싶도록 만든다.

이런 무기를 작가는 실제로 경험한 적이 없다. 대신 용산전쟁기념관을 드나들며 전투기, 그리고 탱크를 종일 스케치했다. 무시무시한 살상력을 지닌 전투기나 전투함이 안보 산업과 군비 경쟁으로 상징되는 국가 체제를 함의한다면 백병전을 하듯 살고 있는 일상의 ‘武裝家長’은 대량 살상무기보다는 개인화기가 더 잘 어울린다. 그리하여 개인화기에 대한 연구 결과가 그의 드로잉 작업으로 이어진다. 군인들이 사용하는 무기들을 접한 적 없는 작가는 실물 사이즈 프라모델 소총을 조립하며 구조를 연구했고 인터넷에 나오는 무기 사이트와 전문 블로그, 밀리터리 매니아들의 쇼핑 사이트 이미지를 면밀히 연구했다. 심지어는 국방부 홈페이지를 뒤져 민원실로 전화해 무기화사단을 방문해 155밀리미터 백린탄을 보고 싶다는 뜻을 전했지만 복잡하고 여의치 않은 상황 때문에 실제 방문을 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런 여러 학습 과정을 거침으로써 작가는 제원과 더불어 무기의 역사까지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M34 백린탄은 누가 어디서 누구에게 사용하였는지, 어떻게 사용하며 어떻게 구성되는지 드로잉과 한 땀 한 땀 바느질해 만드는 작업을 통해 군대를 경험한 남성들 보다 더 무기와 밀착되는 경험을 거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무기를 체화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 사이즈이나 사용할 수 없는 말랑말랑한 무기를 손으로 만드는 작업은 어쩌면 치열한 현실에 대한 무기력을 드러냄과 동시에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폭력적인 체제의 핵심을 거세시킨다. 탱크와 자동소총의 포신과 총구는 힘없이 구부러져 있다. 공격적으로 뻗은 총의 남성적 이미지는 허보리의 다독이는 손길과 여성적 시선 아래 부드러운 곡선과 말랑말랑한 촉감을 얻는다.

넥타이와 양복을 해체하고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로 여겨지는 바느질을 치열하게 수행한 작업은 남성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느끼는 양가적인 감정을 담는다. 당연하게도 허보리의 이런 작업이 총구 위에서 죽음을 건 경쟁에 내몰린 이들을 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이러한 현실을 되돌이켜보는 기회를 만들 뿐만 아니라 나아가 길고 부드러운 포옹처럼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는 역할을 해낸다. 남성들이 수행하는 전쟁에 쓰이는 무기에 맞서 천과 바느질이라는 재료로 이루어낸 수고로운 노동은 인간이 파멸적 도구만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님을 역설한다.

2001년 9월 11일 뉴욕 무역센터가 무너진 지 14년이 되었다. 이후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2014년 12월 비로소 끝이 났다. 그러나 여전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고 허보리 작가가 다룬 오리지널 무기들이 살상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양복을 입은 ‘제1의 성’이 전쟁을 만들고 돈을 돌리고 금융을 장악하고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이 세계를 명확하고 냉정하게 보아야 함은 당연하다. 허보리의 말랑말랑하지만 정교한 양복 무기들은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애통하고 잔인한 면에 생각을 미치게 만든다. 이 세계는 약육강식과 비정이 판치는 세계이지만 우리는 가냘픈 촛불이 일렁이듯 본능과 파괴에 맞서 평화와 부드러움을 옹호해온 이들을 안다.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면 바로 그 작고 가냘픈 부드러움에 바쳐져야 하는 것 아닐까.

 

2015.9

Armed Breadwinners of Boree Hur

Juno Seo

 

 

The must-wear item for a woman to dress up like a man is a necktie. Wearing a necktie and a nice suit is the icon that symbolizes men, and so many male breadwinners wear a necktie and a suit and off to work they go every morning. Whether it be to men or women, wearing a suit or not wearing a suit, life is like a fierce war to all but the artist attempts at revealing how fierce life is by making weapons out of neckties and suits which are the icons of men.

The concerns over tough and fierce life were displayed in the form of medieval shields and swords made out of no-longer-worn neckties and suits that would probably appear in online role playing games. The lives of the modern people plagued with competition is shown through the use of weapons in medieval fantasies like swords that little boys get interested in (or go crazy over) at a certain period of time. Then on, the artist eliminates the element of fantasy and creates weapons that are used in real wars that take place even today. Delicately made tank reduced to half the real size and real-sized rifles M4 and M2, bullets and cases, various high explosives and grenades using clothes from neckties and suits make just about anyone want to hold them in the hand and act like soldiers.

In fact, the artist has no experience with such weapons. Instead, she frequently went to the War Memorial of Korea and made sketches of fighter jets and tanks all day. If the fighter jets and tanks with fearsome killing power refer to a nation’s system symbolized by competition within the security industry and arms race, then rather than weapons of mass destruction, private weapons are more suitable for ‘Armed Breadwinners’ who live every day of their life as if engaged in a hand-to-hand combat. And therefore, the results of researches on private weapons are translated to her drawings. Since the artist has never experienced weapons soldiers use, she studied the structure by assembling a real-size plastic model gun, and thoroughly studied online websites and blogs related to weapons as well as online shopping malls of military maniacs. The artist even rummaged through the Ministry of National Defense online, called the Office of Civil Service to express that she wanted to visit the arsenal to take a look at the 155 mm White Phosphorous, but unfortunately she could not pay visit because the army base was in Gangwon-do and of some complicated process. Repeating the course of research over and over again, the artist learnt of the history of weapons in addition to the components of the weapons such as who and where and to whom M34 Wite Phosphorous was used, how you use it and what it is composed of. Through the extensive work of drawing and completing the work stitch by stitch, she goes through the process of growing closer to the weapons than men who have experience with the military. In other words, she gets to 'embody' the weapons. Perhaps the work of creating actual-size weapons that are way too soft to do any harm exhibit helplessness against reality as well as castrate the core of the violent system created by men. The cannon and the gunpoint of the tanks and rifles are bent helplessly. The masculine image of the gun pointing outward aggressively obtains soft lines and textures under the tender feminie fingers and eyes of Boree Hur.

The artist’s work of dismantling neckties and suits, reassembling them with delicate stitches, which are considered to be women’s work, contains the feeling of ambivalence, of living together with men. Of course, such work of Boree Hur cannot save the people who are driven out to life-staking competitions at gunpoint. However, her work provides us with the opportunity to reflect on the reality we are in, and furthermore, consoles exhausted souls like a long-lasting and soft embrace. Against the weapons men use in war, the painstaking labour performed with clothes and needles strongly argues that humans can make something other than destructive tools as well.

It has been 14 years since the collapse of the World Trade Center of New York in Sept. 11, 2001. The war in Afghanistan that followed swiftly was finally brought to an end in December 2014. Still, war is raging in countries such as Israel, Palestine and Syria, and the original weapons artist Boree Hur used in her works are being used to kill lives. ‘The first sex’ creates war, circulates money, dominates finance, and is controlling the world. Maybe it is only natural to view the world with objective and cold eyes. The soft but delicate suit weapons makes us realize the brutal and deplorable side of the world men has made. Despite the fact that we are living in a world dominated by the brutality and the survival of the fittest, we know of people who went against their nature and destruction as if the shaking flame of faint candlelight, and protected peace and tenderness. If there is greatness to humans, wouldn't it be that very small and faint tenderness?

2014.12

허보리의 마음의 풍경 :

과열된 ‘광장 휴머니즘’을 식히는 미적 기제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동덕여자대학교)

 

 

“진실하면 나는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더욱이 개인적이고 살아있는 것이면 나는 더 힘찬 박수를 보낸다.”

-에밀 졸라(Émile Zola)

 

 

1.

 

허보리는 더 이상 광장으로 가지 않는다. 그의 회화는 광장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춘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마음의 방’으로의 방향선회가 있은 후부터, 선동이나 소란스러운 웅변의 범주 밖으로 벗어난 때부터, 그의 붓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 등장하는 것들은 그래서 광장의 부산물이거나 교차로에서 가져온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마음을 구성하는 것들이다. 시선의 뒤 안으로의 물러섬과 더 가깝게 결부된 것들이고, 살아있음의 흐름이 더 잘 감지되는 것들이다.

 

마음의 방은 어떤 곳인가? 작가는 말한다. “어둠 속의 백열등 빛”이나 “물에 번지는 잉크”처럼 점진적이며 은은하게 흐르는 흐름이 있는 곳이라고, “연기나 향기” 알갱이들처럼 대기 중으로 퍼져나가는 존재의 기운들과 대면하는 곳이기도 하다고! 그곳에서 작가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풍경을, 잉크처럼 번지는 흐름과 실존입자들의 부유를 그리고 또 그린다. 작가는 처음부터 이 보이지 않는 풍경만을 취급해 왔다. 그에게 마음에 의해 그려진 것이 아니며, 따라서 마음을 담겨있지 않은 풍경은 신앙심이 결여된 종교 회화, 충성심이 결여된 군주의 초상화와 같은 것이다. 코로[(J.-B. Camille Corot)의 회화에 대한 테오필 토레(Theophile Thore)의 비평이 떠오르는 게 결코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 “코로는 언제나 단 하나의 똑같은 풍경밖에 그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화가다.󰡓 허보리의 세계에서는 마음을 다룰 때에만 진정한 풍경화가 된다. 마음이 배제된 풍경, 그 안으로 몸을 숨기고 싶은 마음의 방이 부재하는 풍경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다. 멋진 가로수 길과 황혼의 강렬한 색조만을 앞세우는 풍경화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작가가 자신이 그리는 풍경의 밖에 위치해 있는 풍경은 감상용 눈요깃거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풍경으로 나아갈 수 없다.

 

허보리의 마음의 풍경은 “한 개인의 침범당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새삼 부각시킨다. 마음이 침범당해 타인들과의 간격과 거리가 허용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스위스의 데이비드 시그너(David Signer)가 “열대성 휴머니즘”으로 명명한 덫, 보드리야르가 ‘소통의 황홀경’으로 짚은 상황, 곧 사람들의 관계가 지나치게 뜨거워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사람들 사이의 적절한 거리가 확보되지 못해 구성원들이 모방욕망, 경쟁, 열정, 질투심, 원망 등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전체성과 폭력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거리의 폐지와 그로 인한 과열된 관계와 과잉 소통이야말로 포스트모던적 자아의 전형적인 특성이다. 그런 자의식은 피로감의 엔트로피와 폭력성의 증폭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허보리가 부단히 탈주를 기획하지 않을 수 없는 ‘과열된 휴머니즘’이요 ‘광장의 선동’인 것이다. 작가는 숨고, 도망치고, 달아난다. 작은 나무인형에 문을 달고, 그 안으로 들어가 한 동안 틀어박혀 있는 것을 꿈꾼다. 사람들의 시선이 가지 않는 대수롭지 않은 나무 숲으로 숨어버릴까 궁리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스마트폰을 버리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리라고 다짐한다. 작가는 이렇듯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는 곳들을 그려왔다. 때로 그것은 버려진 종이박스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에게 회화는 단지 숨을 곳을 그려넣는 공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회화 자체가 숨는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마음의 풍경은, 그리고 회화는 과열된 휴머니즘을 냉각해 그 체제의 전복을 꾀하는 미학적 기제인 것이다.

 

마음은 비록 연약하고 상처받기 쉽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전체성의 체계에 공포를 야기시킨다. 미메시스적 욕망을 넘어 진정한 ‘한 사람 성(性)’, 깊이 있는 개인성을 담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혁명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마음의 풍경을 스스로를 세상과 격리시키고 자신을 유배지화 하는, 베이컨적 의미의 동굴의 우상에 매몰되는 것과 혼돈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광장의 우상, 모방욕망과 질투심으로 뜨거워진 포스트모던적 파토스의 위험을 인식하고, 그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필연적인 시도다.

화가가 도시의 군주나 수행원이 아니라 “마음의 포수(捕手)”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회화는 도시를 우회하고 광장을 가로질러 마음으로 가는 미적 여정이어야 한다. 도시를 건설하고 광장을 정복하는 것은 폭력과 약탈을 동반하며, 따라서 군주나 정치가의 관심사일 순 있어도 예술가의 길일 수는 없다. ‘마음으로 난 길’이 예술가가 걸어야 할 길인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허보리의 회화론은 “타자와의 폭력적인 근접성과 무차별화”에 매몰되는 이 시대의 위험을 우회적으로 폭로하고 전복시킨다. 지체없이 마음을 향해 선회함으로써, 과열된 ‘광장 휴머니즘’과 ‘도시의 전체성(Totality of the city)’에 대한 안티테제를 수행하는 것이다.

 

 

 

2.

 

테크닉의 면에서 보자면 20세기 미술은 거칠고 동물적인 미술이다. 묘사와 해석이 아니라, 곧바로 행동으로 돌입한다. 화가들은 묘사되는 대상을 배제하는 유행에 대거 가담했다. 마네는 재료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회화’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다. 앙드레 말로도 모델이 아니라 재료에 몰입하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허보리는 그 데카당한 충고를 더 이상 따르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에게 매체로서 회화, 재료로서 안료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대상이나 모델, 내용을 희생양으로 내몰 필요는 없었다. 회화든 재료든 기법이든, 마음의 방을 담는 그릇이거나 그 자체가 될 때에만 의미를 지닐 뿐, 그 자체가 우상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허보리에게 대상이나 모델은 그 자체로서 중요하다. 사물의 외적 특성을 파악하고 재현하는 것이 최우선하는 고려사항은 아니더라도, 사물들은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그것들은 ‘대상으로부터 충분히 독립적인 회화’를 입증하는데 목적이 있는 모더니즘 미학으로 포괄될 수 없다. 작가는 오히려 사물에 심리극적인 역할을 부여해 의인화한다. 그의 회화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일종의 배우(俳優)로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는 상징적 매개체다. 그에게 사물들은 세잔느적 의미의 정물(靜物)이나 뒤샹적 의미의 개념-오브제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들은 연출자가 할당한 배역을 연기해야 한다. 그 역할이 활성화되는 동안 사물들은 사물 자체이기를 중단한다. 바닥에 어질러진 약병은 쇠약해진 심신을 의미한다.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스마트폰은 과도한 소통으로부터의 탈주라는 의미를 지속적으로 생성해낸다. 닫힌 문이 달린 상자, 사다리 없는 높은 집, 집무성한 수풀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싶은 지친 영혼을 비유해낸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우거진 숲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길 잃은 막막한 마음”을 소개한다. 한 때 그렸던 소시지 더미는 존재를 탈진시키는 폭력적이고 부담스러운 일과를 의미했었다.

 

최근작들에선 “두툼하고 볼륨있는 수채 붓”이 등장하고, 상황들은 자주 “닫혀있는 방”이나 “앞이 보이지 않는 우거진 숲”에서 전개된다. 그것들은 여전히 의인화된 작가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마음의 풍경이다. “탐스러운 머리칼과 든든한 몸통, 쭉 뻗은 다리”를 지닌 수채 붓은 작가의 욕망과 꿈과 고통을 대변한다. 그의 분신인 붓은 분홍빛 연기를 내뿜으며 초현실적인 풍경을 만든다. 그렇듯 마음은 현실과 비현실, 일상과 도피된 일상, 실존과 상상된 탈실존의 경계를 분주히 넘나든다. 그 각각의 경험은 그것을 통해 획득된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매개한다. 사방이 밀폐된 하얀 방도 두툼하고 볼륨있는 수채 붓과 같이 의인화된 공간이다. 흰색은 때 묻기 쉬운 색이요, 흰 방은 “침범당하기 쉬운” 장소다. 그림들은 각각의 창백한 불안을 품은 채 아직 그려지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정작 바닥의 흰 카펫에는 큰 얼룩이 번져나가고 있다. 《마음의 점》은 회화라는 고통스러운 침묵에 대한 도상학적 해석을 내포한다. 회화는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다. 질문을 더 극단으로 몰아갈 뿐이다. 그 통증에 의해 마음은 쉽게 얼룩진다. 그리고 화가는 그렇게 생긴 얼룩들에 의해서만 마음의 풍경을 그릴 준비를 마칠 수 있다.

 

마음의 포수는 마음이 거하는 곳, 인간이 피어나고 시드는 존재성의 내밀한 산실(産室)을 향해 매순간 방향을 선회한다. 허보리의 마음의 풍경은 충분히 초현실적이지만 위협적일만큼 낯설지는 않다. 데자 뷔(déjà vu), 또는 언젠가 적어도 한번은 그곳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곳의 어떤 특성이 우리 모두의 보편적 욕망과 더 보편적인 불안, 그리고 모호한 희망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허보리가 그의 마음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틀림없이 더욱 낯설어 보일 그곳을 스케치해내는 만큼,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013.7

허보리

철학하는 그림, 사물과 유희(遊戱)의 스토리텔링

 안현정

“인간의 모든 상태 가운데 오직 유희만이 인간을 완전하게 하고 천성(天性)을 발전시킨다.

그리고 그것의 본질은 자유에 있다.” - 쉴러의 ‘유희충동(遊戱衝動)’

허보리는 감수성이 남다른 작가다. 그는 눈에 띈 사물을 그대로 지나치는 법이 없다. ‘마치 ~와 같다’는 비유적 표현이 작품의 뿌리를 이루고, 그가 처한 상황과 감정이 줄기가 되어 스토리를 만든다. 어린 시절 넋을 놓고 바라보던 동화 속 이야기처럼, 그의 비유는 놀랍도록 해맑고 유쾌하다. 주전자의 밑바닥을 닳고 닳도록 닦아냈다던 작가의 어머니는 허보리가 사물을 의인화하는 첫 번째 모티브를 제공해 주었다. 주전자는 작품으로 환원되면서 뜨겁게 달아오른 불 위에서 시뻘겋게 달궈진 엉덩이를 갖게 된다. 조금이라도 뜨거워질라치면 크게 소리를 내어 지를 것 같은 수다스러움까지 느껴진다. 작가는 명랑한 웃음을 자아내는 ‘유희’라는 도구를 통해 나약한 인간존재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에 도전장을 던진다. 유희에는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신뢰가 깔려있음을 인지한 까닭이다.

사물과 유희의 스토리텔링은 계속 이어진다. 책상 위에 쌓여가는 소시지, 식탁을 화분삼아 끊임없이 자라는 채소들, 침대 밖으로 삐져나온 말미잘 형상의 개체들과 의자 사이로 솟아나는 꽃이 핀 나뭇가지, 남과 여로 분장한 케첩과 마요네즈 등. 변형되고 쌓여가는 형태들은 인간에 의해 거세당한 사물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불완전한 사고의 군집을 대변한다. 이러한 작가의 사유과정은 사물을 관찰하는 단계(정체성에 대한 고민)에서, 작품에 감정을 이입하는 단계(새로운 생명체의 창조)로까지 이어진다. 현실상황 속에서 확장된 비현실의 모티브들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꽉 닫혀 있던 우리의 머리를 자유롭게 해방시킨다.

작가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공간사이의 긴장관계로까지 대상을 확대하고 있다. 르네 마크리트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즉흥적 기법(Depaysement:어떤 대상을 일시적인 환경에서 떼어내 이질적인 환경에 놓음)을 통해 기이하고 낯선 상황을 연출했듯이, 작가는 도시공간․자신의 방․작업실․산과 바다 등에 자신의 감정이 비유된 사물(연필․캔버스 등의 화구, 휴대폰, 주변에 산재한 각종 음식물 등)을 위치시킴으로써 유희의 효용에 사유의 자유로움을 더하고 있다. 방안에 꽉 차버린 산, 버려진 휴대폰, 알에서 태어나 힘겹게 등산하는 캔버스, 침대와 소파 위에 널부러진 음식 등. 이 모든 것은 창작의 메마름을 호소하는 작가 자신에 대한 풍자이기도 하다. 작가는 오늘도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물에 생명이 있음을 인지한다. 그리고 인간이 아닌 ‘사물의 편’에 서서 그들이 속삭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2020 HURBO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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