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불 물

2020.4

@헬리오아트

풀  불  물

 

 

 허보리

몇 년 전 돌아가시기 직전에 마주한 할머니의 모습은 마른 풀 같았다. 정신이 오락가락한 할머니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다 보니 얼마 전 형편없이 시든 꽃을 쓰레기통에 넣기 위해 화병에서 들어올리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촉감과 이 촉감이 매우 흡사했다. 그리고 늘 흠모해왔던 바니타스의 그림들이 스쳐갔다. 인간의 삶을 빠르게 돌려보기 하는 것 같은 낙화의 과정을 한 화면에 담고 싶었다. 그리고 지우고를 반복하는 과정은 우리가 매일을 살아내는 일과 무엇이 다를까.

 

어제 그렸던, 좀 더 피어있던 모습을, 오늘은 지워내고 다시 그 위에 지금의 하루를 기록했다. 그림을 지워내는 일은 어제의 공든 탑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 같은 그런 안타까움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자꾸 희미한 것을 원했던 것 같다. 지나간 어제처럼 우리의 내일도 분명한 것이 없으니.

 

<풀 불 물> 이라는 전시 제목은

길가에 빽빽했던 풀숲이, 겨울에 바람이 드나들도록 텅비어버리는 순간.

그리고 생일 초에 불을 붙이기 위해 피어오른 잠깐의 성냥개비.

그리고 건조한 할머니의 몸뚱이를 생각하고 부르기 편한 순서대로 놓았다.

그 세 가지는 모두 일시적이라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광화문 사냥꾼

2019.2

@백희아트스페이스

광화문 사냥꾼

허보리

 

오전 8시 45분

 

수많은 사람들이 지하철입구에서 쏟아져 나온다. 그들은 한결같이 어두운 양복바지와 허연 와이셔츠, 비슷하게 생긴 자켓을 걸친 채 출근을 한다. 잠시 뒤 점심시간이 되면 무채색의 사람들이 또다시 와르르 밥을 먹으러 나오는 것이다. 1시간 안에 식사를 구겨 넣고, 이를 쑤시며 다시 각자의 일터로 들어간다. 나는 일터에 나와있는 모든 이들이 사냥꾼으로 생각되었다. 우리네 세상이 이렇게 발달하기 전 사슴사냥을 하지 않으면 굶어 죽는 원시의 사회가 있었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는 돈을 사냥하지만 그 돈으로 산, 팩에 담긴 붉은 소고기를 보면 ‘사냥’이라는 원시적인 개념이 아직 존재한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둘째를 낳고 얼마 안되어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할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움집에서 젖을 주는 여자. 그는 창을 매고 사슴을 잡으러 나가는 남자 정도로 느껴졌다. 잘 다려진 와이셔츠와 양복바지. 그리고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맨 넥타이는, 피가 난무한 사냥터에서 창과 칼로 무장한 사냥꾼의 모습이리라. 그가 사냥을 나간 사이 나는 벗어 던진 매일의 와이셔츠를 빨고 다리고, 마트에 가서 과일과 고기를 산다.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심사숙고하여 고른 구이용 소고기의 아름다운 마블링은 내 눈을 즐겁게 한다. 그 마블링에서 나는 미적 희열을 느꼈다.

 

정육을 하다 보면 소의 부위별로 보여지는 단면이 매우 다른데 그것의 조형미는 한 폭의 멋진 추상화 같았다. 나는 잦은 세탁으로 목주위가 낡아 버리게 되는 와이셔츠, 유행이 지난 넥타이나 양복들을 직장인들에게서 수거하여 무기를 만드는 작업을 했었는데, 양복에서 유일하게 화려한 부분인 넥타이에는 아름다운 고기의 마블링을 수놓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수를 놓는 일은 마치 매일 없어지는 밥을 만드는 일이나 매일 빨아야 하는 속옷이나 그런 매일의 지루한 노동같은 죽도록 단순한 일이었다. 그런 단순한 노동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패턴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부와 명예, 그리고 마음속 깊이 자리한, 이루지 못한 꿈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고생한 날 저녁, 잘 구운 한점의 고기가 목구멍에서 사라지듯이 매일의 출근, 매일의 살림, 매일의 노동은 그렇게 하루하루 모래바람처럼 날아가 버리고 있다. 나의 자수라는 작업방식이 이러한 모래바람을 기억하는 일이 되었으면 한다.

무장가장

2015.9

@세움아트스페이스

 

무장가장 武裝家長

던적스러운 삶 가운데서

 

허보리

   이 사회의 최소단위인 가정이 굴러가기 위해 부지런히 돈을 버는 가장 家長들이 있다. 그것이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그들은 이 사회와 문화가 그들에게 떠맡긴 알 수 없는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기계적인 출근을 하고 그 안에서 상대방을 밟고 올라가야만 살아남는 잔인한 구조에 떨어지게 된다. 그것이 정말 내가 원했던, 혹은 나를 위한 싸움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채 너덜너덜 투쟁을 하고 지친 몸을 끌고 돌아온다. 집에서 먹이를 기다리는 '먹는 입' 食口들이 노동의 대가인 돈으로 음식을 먹고 배불러 지지배배 댈 때 비로소 야릇한 성취감과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가장 家長은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겠지만 남성의 양복은 여성의 정장보다 매우 보수적인 형식과 색상 안에서 디자인되며 계절을 느낄 수 없고, 특히 목에 매는 넥타이를 꼭 해야만 선물포장의 리본처럼 비로소 정숙함이 완성 된다는 점에서 더욱 상징성이 강하게 느껴졌다. 이토록 정숙한 의상을 입고 우리는 죽지 않고 이 생을 이어나가기 위해 얼마나 던적스러운가. 그렇다고 어디로 도망 나갈 방도도 없는 채 그 '죽여야 사는 구조'에 우리가 갇혀 있다.

 

 

   여기 몇 가지 아이러니가 있다.

 

벗어나길 원하나 벗어나지 못함

정숙한 모습이나 정숙하지 못함

죽이고 싶지 않은데 죽여야 함

죽이고 있지만 물리적인 살인이 아님

내가 일하지만 일을 해야 하는 필연성을 강요당하고 있음

내가 일하지만 자아가 없음

 

   과 같은 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살상을 하는 무기의 모양으로 돈을 벌기위해 필요한 전투정신을 말하되. 어떠한 상처도 줄 수 없는 무기력한 무기들의 질감으로 그 아이러니함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연민하고 위로하는 마음으로. 혹은 '우리 이제는 좀 다를 수 없을까' 라는 애통한 마음을 섞어서 많이 부드럽고 폭신하고 뚱뚱하게 만든다. 바지의 칼주름은 곡선을 그리며 늘어진 대포로, 정갈한 실크넥타이는 껴안기 좋은 크기의 보드라운 권총으로. 칼은 완전히 방전되어 축 쳐진 퇴근길의 직장인처럼 온전히 서있지도 못하게 그렇게. 더 격렬하게 쓸모가 없는 무기들이다.

In our despicable lives

 

Hur Boree

There are breadwinners who work hard and diligently to sustain their family, which is the smallest unit of society. Whether the breadwinner be a man or a woman, they go to and from work mechanically andsolely with the responsibility and obligations imposed upon them for unknown reasons, and fall into an atrocious structure in which they must trample othersin order to survive. They come back home with distressed bodies totally worn out from a battle without knowing if they engaged in it because they really wanted to, or if it was theirs to fight in the first place.However, a strange feeling of achievement and relief fill them when they see the ‘hungry mouths’ waiting at home are finally stuffed with food and starts chirpingwith satisfaction with the reward money earned from hard work.

 

The breadwinners can be a man or a woman, but if you look at the suits for men, they are designed in a very conservative manner and color when compared to those for women. In addition, one can’t find any trace of seasonal changes in them. The very fact that a necktie must be worn in order to finish the virtuous looks of a suit as if a ribbon on a nicely packaged gift, had a strong symbolic meaning to me. How rigid and doggedare we to wear such a serene attire and continuestruggle through the harsh everyday lives in order to resist death? We are trapped in a ‘structure where you kill to survive’ with no possible way out.

Here are a few ironies that came to my mind:

 

Wanting to escape but can’t;

Seemingly virtuous but isn’t;

Not wanting to kill but have to;

Is killing but isn’t a physical murder;

Am working but is actually being forced to do so by its inevitability;

Am working but is actually unconscious of ‘self’; and so on.

 

In order to express the ironies that came to my mind and the combative mindset needed to earn money inthe form of weapons that actually kill people, I tried tomake use of the element of texture of helpless weapons. Perhaps I was deeply distressed and upset, wondering why we can’t ever break away and change the situation we are in. I tried as much as possible to make them soft and fatty, expressing the knife pleats of the trousers in the form of a cannon stretched out in a curved line and the fine silk necktie in the form of a soft rifle small enough to hold in the arms. The sword canbarely stand on itself, just like the exhausted employeesgoing back home from work, totally useless and helpless.

 

 

마음의 포수捕手

2014.12.18-12.31

@pialux

 

 

마음의 포수 捕手

​허보리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해 왔다.

이것은 연극 같은 것인데 나는 마음의 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 가시(可視)적인 사물을 주물럭거려 최대한 비유적으로 그것에 가까워지도록 연기하도록 도와주는 연출자이다.

그러니까 나의 배우들은 주변의 사물들이고 내가 그리는 배경이나 소품들은 연극의 무대가 된다. 나는 이런 떠다니는 공허한 이미지를 잡아내는 포수(捕手) 이다.

 

내 주변의 사물들 중에서 어떤 용도나 모양에 있어서 가장 인간다운 주체에 대해 고민해 봤다. 그것은 정말 너무나 가까이 있는 붓이었는데(사실 모든 사물이 인간에 비유될 수 있다. 또 모든 사물로 인간의 인생을 사유할 수 있는 것 같다) 두툼하고 볼륨 있는 수채 붓은 탐스러운 머리칼, 든든한 몸통, 쭉 뻗은 다리 등으로 비유될 수 있는 신체를 갖고 있는 듯 보였다.

 

또한 붓은 일꾼이고 노동자이다. 그리고 그림을 만드는 도구로서 창조, 생산의 임무를 하고 있다. 나는 이 붓에 내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듯하다. 이 붓은 자아를 상징하고

고난 중의 꿈을 꾼다. 그래서 그(그녀)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다른 무대에 서게 되는데 각각의 곳에서 그 공간이 가지는 각각의 감정에 충실한 채 존재한다. 이 주체는 감정의 주인이 되어 공간을 소유한다.

 

마음을 만질 수 있다면 그 질감은 어떤 것일까. 어둠 속에 연약하게 일렁이는 빛이나 향기를 가진 연기, 혹은 부드럽게 바람에 흔들리는 길고 가는 털, 바닥부터 조용히 천천히 차오르는 물, 미끌거리고 질척이는 액체는 아닐까. 그것은 공간 안에 당당히 존재하는 무겁고 딱딱한 육면체의 대리석이 아니고, 그 반대의 어떤 것이며 존재하다가도 쉬이 사라질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을 표현했지만 내 그림 속에 마음은 없다. 그냥 상황, 설정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마음의 안이라서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 또 내가 고정시킨 상황이지만 그것은 1대1로 대상과 일치할 수 없다. 그 감정을 어찌 말로, 글로, 이미지로, 음악으로 춤으로 100% 재현할 수 있을까. 단지 가까이 가서 다시 느끼고 영원히 기록하고 싶은 소망이 있을 뿐이다.

©2020 HURBO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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